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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화학당과 보구녀관 이야기 (1-5화)

 

제1화

 

“이제 피부를 이식해야 됩니다.” “네? 내 살을 떼어서요?” 환자가 피부 떼어내는 것을 거부하자, 로제타 셔우드¹ 선생님(로제타)은 본인의 살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본 봉순오마니가 달려와 말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화학당의 말괄량이 봉업은 자신의 살을 떼어주겠다고 나섰다. 로드와일러² 선생님과 벵겔³ 선생님도 자원했다. 그러자 환자가 용기를 냈다. 

 

1890년 11월 11일 오후 2시, 손가락 분리수술을 시작하였다. 3시간에 걸쳐서 손가락을 손바닥으로부터 분리하고 하나씩 부목을 대어 붕대로 감쌌다. 12월에는 화상으로 손바닥에 붙었던 세 개의 손가락에 피부 이식수술을 했다. 마침내 환자는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어 퇴원했다. 

 

로제타가 조선에 도착한지 한 달이 채 안됐을 때였다. 한양에서 50km나 떨어진 시골에서, 16살 소녀가 가마를 타고 왔다. 4년 전에 화상을 입어, 오른 손의 엄지와 검지를 뺀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었다. 딸이 14살이 되면 시집을 보냈고, 16살이 넘도록 시집을 못 보내면, 집안의 수치로 여기던 당시의 상황에서, 손가락 장애가 그녀의 앞길을 막고 있던 소녀의 회복은 모두에게 큰 기쁨과 감격의 사건이었다. 

 

“그 선생님은 자기 살을 떼어내어 환자에게 주신 분이요!”

 

비가 몹시 내리던 날, 산후 부작용으로 사경을 헤메는 부인을 위해, 로제타에게 왕진을 청한 후, 못 미더워하며, 밖에서 초조히 기다리는 환자의 남편에게 기수가 한 말이었다.

 

1887년 고종황제가 '이화학당' 사액현판을 하사하며, 문을 지키는 기수를 보냈다. (사액현판: 사액은 당시 고종이 서원이나 향교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만들어 하사하는 제도로 국가 기관임을 알리고 보호하는 제도.)

기수의 월급은 학당에서 지불했지만, 외국인을 기피한던 당시에, 안전한 곳으로 인식되도록 돕고, 무모한 테러도 막아 주었다.

 

1) Rosetta Sherwood Hall(1865.9.19.~1951.4.5.): Rosetta Sherwood는 펜실베니아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0.10 보구녀관에 부임. 1891.1 의학교육 시작, 1892 William Hall과 결혼. 동대문병원과 평양 광혜여원 창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 인천간호전문보건대학, 평양외국인학교, 맹아학교 창립, 점자책 발간,  43년간 조선 근대의학 발전과 교육에 이바지함.

2) Louisa C. Rothweiler (1853.3.9.~1920.12.28.): 1887.10 이화학당 교사로 부임, 2대 이화학당 당장 (1890.5~1892.6.25)

3) Margaret Bengel (1869:~?): 1890.10 이화 학당 교사, 로드와일러의 친구, 이화학당의 요청으로 선교사 지원. 박에스더에게 오르간을 가르침.

 

제2화

앨리스 아펜젤러, 메타 하워드, 루이자 로드와일러, 윌리엄 스크랜튼, 로제타 홀, 보구녀관 툇마루의 메타 하워드

Honor to Those

         who Love Korean People

 

1885년 봄, 조선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서양인에 대한 거부감, 의심, 편견도 컸지만, 괴 소문들이 난무했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서양 아기였던 앨리스 아펜젤러⁴는 외국인에 대해 닫혀 있던 조선 여인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호기심으로 아기를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예쁜 아기를 보며 마음의 벽들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지위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도와주고 치료하는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사랑, 부부가 함께 도우면서 사는 가정의 모습을 보며, 차츰 조선인들의 생각과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도무지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려하지 않던 여인들을 위해 시작된 보구녀관에 메타 하워드⁵가 부임한 후, 여의사로 부터 치료를 받게 된 조선 여인들은, 부임 2년 만에 하워드가 건강 악화로 미국에 귀국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남자의사인 윌리엄 스크랜튼⁶과 윌리엄 맥길⁷에게도 진료를 받았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은 여의사가 다시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1890년 10월 14일, 보구녀관에 부임한 로제타는,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 때문에, 도착 다음 날 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통역은 로드와일러² 선생님이 맡았다. 그런데 열흘째 되던 날, 로드와일러가 독감으로 심하게 앓게 되자, 급히 이화학당의 김점동¹⁰이 통역하러 보구녀관으로 왔다. 점동은 학당에서 누구보다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1) Rosetta Sherwood Hall(1865.9.19.~1951.4.5.): Rosetta Sherwood는 펜실베니아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0.10 보구녀관에 부임. 1891.1 의학교육 시작, 1892년 William Hall과 결혼. 동대문병원과 평양 광혜여원 창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창립. 인천간호전문보건대학, 평양외국인학교, 맹아학교 창립, 점자책 발간, 등 43년간 조선 근대의학 발전과 교육에 이바지함.

2) Louisa C. Rothweiler (1853.3.9.~1920.12.28.): 1887.10 이화학당 교사로 부임, 2대 이화학당 당장 (1890.5~1892.6.25)

3) Margaret Bengel (1869:~?): 1890.10 이화 학당 교사, 로드와일러의 친구, 이화학당의 요청으로 선교사 지원. 박에스더에게 오르간을 가르침.

4) Alice Edna Appenzeller (1885.11.9.~1950.2.20.): 최초의 선교사 Henry G. Appenzeller 의 딸, 이화학당 6대 당장, 이화학당을 이화여전으로 승격시킴. 정동에서 신촌으로 캠퍼스 이전. 신촌 캠퍼스 조성을 위한 모금운동 등, 평생을 이화를 위해 바침.

5) Meta Howard (1862~1930): 시카고 의학부 졸업 후 1887.10 보구녀관에 부임한 최초의 여의사선교사, 간호사나 보조자 없이 혼자 진료를 맡아 과로가 누적되며 건강이 나빠짐. 1889.9 건강 악화로 귀국, 다시 돌아오려 했으나 못 옴.

6) William Benton Scranton (1856.5.29.~1922.3.20.): 스크랜튼 여사의 아들, 예일대 졸업, 뉴욕의대 졸업, 내과의사, 1885.6 어머니와 부인, 어린 딸과 함께 조선에 도착, 시병원, 보구녀관, 동대문 시약소 남대문 시약소, 애오개 시약소, 서울요양원 창설, 선교, 의료, 교육활동. 사대문 밖 빈민들을 도왔고, 독립운동가들을 키우고 지원하며 조선의 편에 서다가 선교사 직책을 포기하게 되고, 일본으로 가서도 조선인들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음, 일본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투병 중 소천함.

7) William B. McGill: 메타 하워드가 귀국 후, 1년간 윌리엄 스크랜튼과 보구녀관에서 진료, 원산, 공주 등에서 의료, 선교, 교육 활동.

8) Mary Fletcher Scranton (1832.12.9.~1909.10.8.): 이화 학당 창립. 수원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 창립, 삼일소학당, 공옥여학교, 매일여학교 창립, 진명, 숙명여학교 설립을 도움. 선교사들의 어머니 역할, 여성교육과 계몽, 선교 등, 조선 근대화의 어머니

9)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1902.6.11.); 앨리스 아펜젤러의 아버지, 감리교선교사로서 스크랜튼가족,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 옴. 배재학당을 창립, 목포 성서번역 모임에 가는 중 선박사고로 소천, 임신한 상태로 조선에 오는 배를 탔던 부인은 아이들에게 조선 선교사가 되도록 교육하여네 자녀 중 셋이 조선 선교사가 됨.

10) 박에스더 (1877.3.16.~1910.4.13.): 김점동, 김에스더(결혼 전 이름). 1891.1.25.세례를 받고 세례명으로 에스더를 선택했고, 그 후부터 에스더로 불림. 1893.5.24. 박여선과 결혼 후, 박에스더로서 유학하여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함. 서재필에 이어 조선인으로 두 번째 미국의사면허를 받음. 광혜여원, 보구녀관에서 진료. 황해도 평안도에서 선교, 교제 번역, 교육, 계몽 활동을 함

 

제3화

이화학당 취침 시간, 수업시간, 김장방학에 김치담그기, 방과 후 시간에 다딤질(선배가 어린후배 의복을 챙김)

 

Honor to Those

         who Love Korean People

 

여아들을 교육하기로 계획하고 있던 스크랜튼 여사는 1886년 2월에 학교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조선의 여인들은 당시에 밤에만 외출할 수 있어서, 외국인들은 여아는 물론이고, 여인들도 만나보기 어려웠다. 그러던 1886년 5월 31일에 김씨부인이 영어를 공부하러 스크랜튼 여사를 찾아왔다. 첫 학생인 셈이다. 6월에는 소문을 듣고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집 딸이었던 10살 된 꽃님이가 스크랜튼 여사 집에 맡겨졌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비난 하며, 아이를 외국으로 팔아 버릴지도 모른다고 얘기하자, 양심에 가책도 느끼고, 불안해 진  꽃님이 부모가 꽂님이를 찾으러 왔다. 스크랜튼 여사는 잘 설득한 후 아무데도 보내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 주었다. 꽃님이는 계속 교육을 받았고, 그 후 세례를 받아 애니로 불렸다.

 

그 해 여름,  윌리엄 스크랜튼⁶은 서대문 근처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가마니 한장은 깔고 한장을 덮고, 구걸하며, 앓고 있는 여인과 어린 딸을 발견했다. 그날 밤 막노동꾼을 불러 모녀를 진료소로 옮겼다. 남편은 부인과 함께, 4살쯤 된 딸을 서대문 밖에 버려 두고 시골 집으로 가버렸다. 내과 의사였던 윌리엄⁶의 치료로 회복(3주쯤되서 회복되기 시작... )된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스크랜튼 여사가 돌보며 교육을 하도록 허락했다. 그 아이가 이화학당의 세 번째 학생인 간난이였다.

 

1886년 11월, 이화학당 한옥 교육관이 완공될 무렵에 점동¹⁰이 다섯번째 학생이 되었다. 김씨부인이 병이 나서 3달 만에 학업을 포기하여, 학생이 겨우 3명이 남아있었다. 스크랜튼 여사는 네 아이들을 보석처럼 여기며, 정성껏 보살피고 가르쳤다.

 

참고: 1886년 봄, 김점동¹⁰의 집에 넷째 딸이 태어났다. 이화학당 근처에 살면서 아펜젤러⁹ 목사의 집사로 일을 하고 있던 점동의 아버지(김홍택)는 아펜젤러 목사의 제안을 받아 들여, 어려운 가정 형편에 식구도 줄일 겸, 점동을 스크랜튼⁸ 여사에게 맡긴다. 첫째 딸은 이미 시집을 갔고, 14세였던 둘째는 혼인을 준비할 나이라, 10살(만 9세)인 셋째 딸 점동을 보낸 것이다. 아펜젤러⁹ 목사가 살고 있던 집의 바로 동쪽 한옥에 스크랜튼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점동의 아버지는 스크랜튼⁸ 여사가 두 여아를 집에서 돌보며 교육하고 있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6) William Benton Scranton (1856.5.29.~1922.3.20.): 스크랜튼 여사의 아들예일대 졸업뉴욕의대 졸업내과의사, 1885.6 어머니와 부인어린 딸과 함께 조선에 도착시병원보구녀관동대문 시약소 남대문 시약소애오개 시약소서울요양원 창설선교의료교육활동사대문 밖 빈민들을 도왔고독립운동가들을 키우고 지원하며 조선의 편에 서다가 선교사 직책을 포기하게 되고일본으로 가서도 조선인들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음일본에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투병 중 소천함.

8) Mary Fletcher Scranton (1832.12.9.~1909.10.8.): 이화 학당 창립수원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 창립삼일소학당공옥여학교매일여학교 창립진명숙명여학교 설립을 도움선교사들의 어머니 역할여성교육과 계몽선교 등조선 근대화의 어머니

9)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1902.6.11.); 앨리스 아펜젤러의 아버지감리교선교사로서 스크랜튼가족언더우드와 함께 조선에 옴배재학당을 창립목포 성서번역 모임에 가는 중 선박사고로 소천임신한 상태로 조선에 오는 배를 탔던 부인은 아이들에게 조선 선교사가 되도록 교육하여네 자녀 중 셋이 조선 선교사가 됨

10) 박에스더 (1877.3.16.~1910.4.13.): 김점동, 김에스더(결혼 전 이름). 1891.1.25.세례를 받고 세례명으로 에스더를 선택했고, 그 후부터 에스더로 불림. 1893.5.24. 박여선과 결혼 후, 박에스더로서 유학하여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함. 서재필에 이어 조선인으로 두 번째 미국의사면허를 받음. 광혜여원, 보구녀관에서 진료. 황해도 평안도에서 선교, 교제 번역, 교육, 계몽 활동을 함

제4화

만 13살의 점동, 오와가(1890), 만 16살의 점동과 애니(1893), 여메례, 노수잔, 김점동(1894.4)

 

 

당시 선교사들이 겪은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언어 문제였다. 교재도 없었고, 조선어를 가르쳐 줄 선생님도 귀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이 학생들과 영어로 소통하면서, 오히려 학생들은 영어가 빨리 늘었다. 4년간 이화학당에서 지낸, 만 13살의 점동은 통역을 하고, 영어로 의학을 배울 수 있었다. 나중에 일제 강점기를 지내고 해방이 되어, 이화여자대학 의과대학이 시작된 1945년에는 한국어 의학 교재가 없어서 영어로 된 교과서로 가르쳐야 했는데, 의과대학 학생들이 영어를 잘 못해, 의학보다 우선 영어를 가르쳐야 했다.

 

1890년, 일본에서 미션 스쿨에 다니던 오와가는 관료였던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와서, 이화학당에 다녔다. 조선에 머무는 3년 동안, 점동의 단짝이었던 오와가도 로제타를 돕겠다고 자원을 했다. 조선 소녀들은 낮에 나들이를 다닐 수가 없어서, 낮에는 일본인인 오와가가, 밤에는 점동이 로제타의 왕진에 따라가 통역을 했다. (로제타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언어를 익힐 시간 없이 환자를 봐서, 통역이 꼭 필요했는데, 나중에 배우려 애쓰기도 했지만, 조선어 습득을 어려워 했다고 한다.)

 

1891년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 겨울 방학에 로제타는 이 두 학생에게 생리학을 가르치며 의학에 대해 이야기 해 줬다. 점동은 해부학 실습에 관해 자세히 물었다. 로제타의 설명을 듣던 오와가가 절대로 그런 일은 못할 것 같다고 할 때, 점동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 점동의 반응을 유심히 살펴본 로제타는 점동이 의학공부를 해서 의사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했다.

 

로제타가 1891년 1월 겨울방학 때, 점동, 오와가와 함께, 애니, 봉순, 수잔에게 시작한 생리학 수업은 조선에서의 첫 여성 의학교육으로 인정 받고 있다. 애니는 이화학당의 두 번째 학생, 꽃님이의 세례명이다. 봉순은 초기 보구녀관에서 일을 돕던 봉순오마니의 딸로 추정되고, 수잔은 후기 로제타의 의료사역까지 함께 했다.

 

학생이 시집을 가면 이화학당과 보구녀관을 떠나게 됨을 애석해 하며, 로제타는 남편을 일찍 잃은 여아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화 학당의 세 번째 교사이면서 첫 조선 여교사였던 이경숙이 좋은 예였다. 이경숙은 충청도 홍성의 가난한 선비 집안의 과부였다. 스크랜튼 여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어 이화학당에서 한글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며, 이화학당과 조선 사회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청상 과부였던 노수잔, 그리고 결혼 후 곧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남편이 병으로 죽어 혼자 된 여메례는 이화학당과 보구녀관에서 훈련 받아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하므로 스크랜튼과 로제타의 염원을 실현해 준다.

 

 

고종이 하사한 이화학당 현판, 초기 이화학당 전경, 현재의 이화여고, 시집 가는 날이 이화학당을 졸업하는 날이 됨

 

제5화

호러스 알렌, 호러스 언더우드, 존 헤론, 윌리엄 스크랜튼, 헨리 아펜젤러, 초기 제중원

1885년 2월 3일, 스크랜튼 일가는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아라빅호를 타고 떠나, 2월 27일에 일본의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1884년 12월에 개화파가 일으켰다가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²으로 조선 정국이 몹시 혼란했다. 선교사들은 팀을 나누어 조선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우선 3월 31일에 아펜젤러 부부와 호러스 언더우드가 조선으로 떠났다. 부활절 날이던 4월 5일에 제물포항에 드디어 도착했는데, 외국여성 입국이 위험하다하여 아펜젤러 부부는 호텔에서 1주일간 머물다가 4월 13일에 일본으로 돌아오고, 언더우드만 입경에 성공했다. 4월 18일 청일간의 천진조약이 체결되어 정국이 좀 진정되자, 이번에는 윌리엄 스크랜튼³이 혼자  조선으로 떠났다. 5월3일 한양에 도착한 윌리엄은 알렌⁴을 도와 제중원⁵에서 일을 시작한다. 

 

한편 독자적인 선교 활동을 위해 윌리엄은 서대문과 서소문 중간쯤에 위치한 정동의 성벽 언덕 아래, 넓은 마당과 사랑채와 헛간이 딸린, 두 채의 한옥으로 된, 1800여 평의 큰 집을 구입하게 된다. 그 후 6월에 스크랜튼여사는 며느리와 손녀, 아펜젤러 부부, 의료선교사 헤론 부부와 함께 일본에서 출발하여,  6월 20일에 이 집에서 여장을 푼다.

 

정동에 위치했던 미국 공사관을 중심으로, 윌리엄 스크랜튼은 동쪽의 집에, 아펜젤러 부부는 서쪽의 집(이집에서 점동의 아버지 김홍택이 일을 함)거주하였고, 길 건너편에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¹가 살았다.

 

6월에 존 헤론⁶이 입국하자 제중원은 헤론이 맡고, 윌리엄은 자신의 정동 집에서 병원을 열고 서민들 진료를 시작하고. 9월부터 아펜젤러⁷는 자신의 집에서 두 명의 남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배재학당의 태동)한다.

 

그해(1885년) 10월에 스크랜튼⁸ 여사는 여성교육사업을 위해 서대문 성벽 바로 안쪽 언덕의 6,120평의 넓은 부지를 구입하여, 1886년 2월부터 선교사 사옥과 학교, 기숙사로 활용할 200여 평의 기와집을 짓기 시작했다. 교육은커녕,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묵묵히 일만 하는 조선여성들을 보면서, 스크랜튼여사는 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선교회와 친구들에게 경비를 요청했다. 

 

10월 23일 드디어 450달러로 19채의 초가집들이 들어서 있던 언덕 위의 부지를 사게 되었다. 하지만 건물을 위한 추가 예산이 책정되지 못했다는 소식에 접하여, 여사는 백방으로 새 건물의 필요성을 알렸다. 결국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의 블랙스톤 부인이 3,000달러를 보내 주었고, W.F.M.S.⁹ 뉴욕지회에서 700달러가 도착하여, 김점동¹⁰이 입학한 11월에 소망하던 교사가 완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