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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장 앨리스 아펜젤러 선교사 1편

생후 6개월(1886), 이화학당 3대 메이퀸(1915), 이화여전 6대교장, 4세 (1888)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는 약혼녀(Ella Dodge)에게 긴 편지를 썼다. 결혼하면 조선에 선교사로 가고 싶은데...... 그리고 둘은 1884년 12월 17일 결혼했다. 1885년 2월 3일, 조선을 향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때, 부인은 임신 초기였다. 일본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아펜젤러는 부인에게 먼저 발을 내딛어 조선 땅을 밟게 했다.

 

조선 도착 7개월 후, 11월 9일에 앨리스가 태어났다. 붉은 곱슬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앨리스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서양인을 보면, 피하고,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이었지만, 아기를 볼 때의 반응은 달랐다. 게다가 1800년 초부터 외국인들이 조선에 왕래했지만, 서양 아기가 태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호기심 많은 조선인들은 너도 나도 앨리스를 본다는 핑계로 아펜젤러의 집 문턱을 넘었다. 앨리스의 집에 있던 큰 거울, 의자, 난로 등 모든 것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았지만,  모두 아기를 예뻐했다.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조선 선교에 기여했던 앨리스는 정동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아이들과 놀며 지냈고, 조선말을 잘했다. 나중에 미국 학교에 다닐 때, 콩글리시를 하는 조선에서 온 학생으로 유명했다. 그 중 하나가 "What was that girl's front(통상은 first) name?" ..... 

 

1900년 9월, 두 번째 안식년을 맞은 아펜젤러의 가족은 미국에 돌아갔다. 다 같이 조선에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앨리스의 건강이 좋지 않아, 1901년 9월, 아버지만 먼저 조선으로 떠났다. 그런데 1902년 6월, 아버지가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탄 증기선이 다른 배와 충돌하여 목포 앞바다에서 침몰한다. 아펜젤러는 다행히 구조가 되었는데, 수행하던 조선인(조한규 배재학당 한문교사)과 여학생(정신여학교)이 보이지 않자, 그들을 구하러 물속에 뛰어 든 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에 남은 아펜젤러의 부인은 4 남매(앨리스, 남동생 (Henry Dodge Appenzeller), 두 여동생 (Ida Hannah Appenzeller, Mary Ella Appenzeller)를  최선을 다해 교육했다. 그리고 늘 자녀들에게 조선 선교에 대한 사명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앨리스는 웰슬리 대학을 졸업 후, 1915년 교육 선교사가 되어 이화학당으로 돌아 왔고, 35년간을 오직 이화를 위해 살았다. 남동생도 조선 선교사가 되어, 아버지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헌신했다. 막내 동생은 이화학당의 교사로 부임했다가 결혼 후 조선을 떠났다.

 

룰루 프라이 4대 당장, 프라이홀, 지넷 월터와 체조를 배우는 학생들

 

 

앨리스 아펜젤러는 1915년, 이화학당에 부임 후, 룰루 프라이 당장을 도와 중학과(1904년에 설치)와 대학과(1910년에 설치)에서 역사와 영어를 가르쳤다. 4년 뒤 1919년, 프라이 당장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 가게 되자, 앨리스가 당장 서리를 맡았다.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조선은 여성 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고, 이화 학당에 입학하려는 학생이 너무 많아 다 받을 수가 없었다. 여학교를 늘리는 것도 필요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전문 여성을 길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급하다고 여긴 앨리스는 대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많은 조선의 선각자들조차 고등교육보다는 일반 교육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고, 일제는 우민정책을 지향하고 있어서, 모든 것이 순조롭지 않았다. 

 

1919년 3월1일,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학생들! 그 가운데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여성이 나라를 위해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들 수 있으리라 상상을 못하던 조선인들에게 유관순과 함께 한 여학생들의 모습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의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여학생들, 체포와 고문을 감내하는 여학생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조선인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이화 학당에 들어오려는 학생들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여학생이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은 겨우 13군데, 각각 100명 정도 수용해도 1300명 정도가 학교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 학교들도 교사들이 부족해 충분한 교육이 어려웠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은 후, 전문인이 되고자 하는 여성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일부는 중국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앨리스는 여성들이 안전하지 않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도 무척 안타까웠다.

 

1921년에 앨리스도 안식년이 되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지넷 월터 (Jeannette A. Walter)가 이화학당의 당장서리를 맡았다. 앨리스는 안식년 동안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22년에 이화학당에 다시 돌아 왔다. 미국에서 투병하던 프라이 당장이 세상을 떠난 1921년부터 월터는 5대 당장을 맡고 있었는데, 앨리스가 돌아 오자 앨리스가 당장의 적임자라고 여겨, 앨리스를 당장으로 추천한다. 그래서 앨리스는 그해 10월에 이화학당의 제6대 당장에 취임했다. 앨리스는 우선 학생들이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던 낡은 손탁호텔을 헐고, 그 자리에 대학부가 사용하기 위한 건물을 지었다. 건축비는 앨리스가 안식년 동안 모금한 5만불로 감당했다. 새 건물에 필요한 비품은 이화학당 동창들이 담당하기로 했다. 1922년 10월에 시작하여 1923년9월에 3층의 서양식 건물이 완공되었고, 이화학당에 대학부를 시작한 룰루 프라이 당장을 기념하여 프라이홀이라 명명했다. 프라이홀은 여성교육에 매진한 선교사들의 성공적인 결실로 여겨졌고, 한국 여성고등교육을 공식화하는 상징물이 되었고,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