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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이화의대 역사

History of Medical School of Ewha Womans University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의 기원

 

2018 년 10 월에 준공된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과 이화의료원 ( 서울병원 )

 

 

 

Dr. William Benton Scranton Rev. 1856.5.29~1922.3.23

 

닥터 윌리엄 스크랜튼 Dr. William Benton Scranton 선교사는 1884년 10월에 미국 북감리교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852월에 미국을 떠나 조선에 와서, 6월부터 한양의 정동에 마련한 집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했다. 미국에서 약품이 도착한 1885910일 부터는 한옥 자택 한쪽에 정식 진료소를 열었다. 다음 해에는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자리에 있던 넓은 한옥에 수술실과 입원실을 준비해, 1886615일, 새 병원을 개원했다.  'American Doctor's Dispensary'  (미국 의사의 진료소)로 불리던 이 병원에, 1887 4월, 고종은  ‘시병원’(施病院) 사액현판을 내렸다. 1885 4월에 닥터 호러스 알렌이 왕실의 도움으로 시작한 ‘광혜원(제중원)’에 이어, 시병원은 국가가 인정한 두 번째의 병원이었고, 선교 기금으로 세워진 최초의 민간병원이었다.

 

1886 년 6 월15 일 'American Doctor's Dispensary' 로 개원한 '시병원' ('Universal Hospital')

 

 

 

Mrs. Mary Fletcher Scranton 1832.12.9~1909.10.8

 

닥터 윌리엄 스크랜튼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 Mrs. Mary Fletcher Scranton 선교사는 1884년 11월에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WFMS: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North)에서 조선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85년 6월에 조선에 도착하여 여성과 어린이 교육을 위해 부지를 마련하고,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1886531일에 한 학생이 찾아와 교육이 시작되었고, 188611월에는 궁궐 같은 한옥 학교가 완공되었다.   18872월에 고종이 이화학당사액현판을 내려 국가의 정식 학교로 인정받게 되었고, 조선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와 2023년 현재 4600여명의 여의사를 배출한 의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이화학당: 1886년 11월에 정동 언덕에 완공된 200칸 크기의 한옥 기숙학교

 

당시 조선은 내외법으로 남자 의사는 직접 여성 환자를 진료하기 어려웠다. 윌리엄 스크랜튼은 여성을 위해 여의사가 필요함을 선교부에 알렸고,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도 WFMS에 여의사 파송을 요청했다. WFMS1886년에 여의사 파송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고, 188710월에 여의사 메타 하워드 Dr. Meta Howard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했다.

 

 

Dr. Meta Howard 1862. 6.13~1930. 7.28

 

닥터 메타 하워드는 18871031일부터 시병원에서 여성 환자 진료를 시작했다. 188810월에는 시병원 동쪽 한옥(정동 33번지)에 여성전용 진료소가 개설되었고, 고종이 이곳에 보구녀관'(普救女館) 사액현판을 내려, 국가의 정식 여성병원이 되었다.

 

1888년 10월 보구녀관' (普救女館)

 

닥터 윌리엄 스크랜튼은 더욱 열악한 환경의 사대문 밖 환자들을 안타까이 여겨, 1886년부터 천민들이 거주하던 동대문 밖에 나가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8889월 매년회에 참석한 미북감리교 파울러 감독의 허가를 받아, 서대문 밖과 동대문 안쪽, 그리고 남대문 안쪽에 진료소를 위한 부지를 준비했다. 188812월에 전염병 환자들이 내다 버려지던 곳, 서대문 밖 애오개에 진료소를 열었고, 189010월에는 가난한 상민들의 지역인 남대문에도 진료소를 개설해, 병들고 소외된 서민들이 쉽게 병원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남대문의 상동병원: 1895 년 정동의 시병원과 통합

 

그런데, 닥터 메타 하워드는 과중한 업무로 건강이 나빠져, 18899월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후 시병원의 닥터 윌리엄 스크랜튼은 18898월에 부임한 닥터 윌리엄 맥길 Dr. William McGill 선교사와 함께 보구녀관 환자도 진료했다

 

 

1890 년 Dr. Rosetta Sherwood 1865.9.19~1951.4.5

 

1년쯤 지나 18901014, WFMS에서 파송된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Dr. Rosetta Sherwood 선교사가 보구녀관에 부임했다. 처음 며칠은 닥터 윌리엄 맥길을 도와 진료를 했고, 이화학당의 교사이던 루이자 로드와일러 Miss Luisa Rothweiler 선교사가 통역을 했다.

 

1890년 만 13살 김점동 1877.3.16~1910.4.13

 

열흘 뒤, 1024일부터 김점동이 닥터 로제타 셔우드를 도왔다. 김점동은 188611월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당시에 만 13살이었다.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오와가도 닥터 셔우드를 돕기로 해, 닥터 셔우드는 두 학생을 훈련하기로 마음먹고, 첫날부터 계량법, 조제법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음 해 18911월부터는 김점동, 오와가, 노수잔, 봉순과 애니, 다섯 학생에게 생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에는 김점동, 여메례, 노수잔에게 약리학을 가르쳤다. 김점동은 닥터 셔우드로부터 골학, 해부학 등 기초의학을 배우고, 진료를 돕고 수술 보조를 하며 질병과 치료법에 익숙해졌다.

 

1894년 4월 여메례 노수잔 김점동: 초기 의학교육을 받은 학생들

 

1891114일에 동대문 진료소가 마련되었는데, 그 후 메리 스크랜튼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을 때, 볼드윈 부인 Mrs. Lucinda Brown Baldwin으로부터 받은 후원금으로 동대문 진료소 서쪽 도로변에 넓은 부지를 확보하여, 1892년에 동대문 볼드윈 진료소 Baldwin Dispensary와 볼드윈 교회를 건축했다.

 

1892년 완공된 동대문 볼드윈 진료소 Baldwin Dispensary

 

그 후 닥터 로제타 홀(로제타 셔우드는 1892. 6. 27. Dr. William Hall 과 결혼하여 Dr. Rosetta Sherwood Hall 로 이름 변경)은 주 2회는 동대문의 볼드윈 진료소에 가서 진료했고, 1892년에 부임한 여의사 메리 커틀러 Dr. Mary M. Cutler18933월부터 보구녀관과 볼드윈 진료소를 위해 부임하자, 닥터 로제타 홀은 남대문 진료소에서 주 3, 볼드윈 진료소에서 주2회 진료를 했다.

 

1890년 보구녀관: 1913 년에 동대문 릴리안 해리스기념 병원과 통합됨

 

18945월에 닥터 로제타 홀은 남편 닥터 윌리엄 홀과 함께 평양으로 부임하였고, 1893년에 결혼한 김점동 부부가 동행했다. 그러나 6월에 일어난 동학 농민 봉기로 평양 선교 팀은 모두 한양으로 복귀했고, 농민 봉기는 7월에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10월 초, 닥터 윌리엄 홀은 청일전쟁의 격전지였던 평양으로 올라가서 환자들을 돌보다 전염병에 감염되어 순직하게 된다.

 

Dr. William Hall: 1894 년 청일전쟁 후 평양

 

충격을 크게 받은 닥터 로제타 홀은 막 돌이 지난 아들 셔우드 홀과 귀국을 결정한다. 김점동이 닥터 로제타 홀을 따라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자, 닥터 로제타 홀은 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김점동 부부와 함께 1894127, 한양을 떠났다.

 

1895 년 9 월 박에스더 부부와 닥터 로제타 홀 가족이 미국에서

 

김점동(세례를 받고 김에스더로, 박여선과 결혼 후 미국에서 박에스더로 불림)은 마침내 1896101일에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00514일에 졸업 후, 미북감리교 WFMS 의료선교사로서 8월에 미국을 떠나, 10월에 고국의 평양 광혜여원으로 부임했다.

 

박에스더: 1900년 5월14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졸업

 

19015월에 보구녀관을 맡고 있던 닥터 메리 커틀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어, 이화학당 출신의 여의사 박에스더가 6월부터 보구녀관을 맡았고, 19033월에는 안식년에서 돌아 온 닥터 메리 커틀러가 다시 보구녀관을 맡게 되어, 박에스더는 다시 평양으로 부임했다.

 

평양 광혜여원: Dr. Rosetta Hall 이 평양에 세운 여성병원

 

여의사 릴리안 해리스 Dr. Lillian Harris 선교사는 189711월에 부임하여 볼드윈 진료소를 맡았다. 19015, 닥터 로제타 홀이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어 닥터 릴리안 해리스는 평양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18999월부터 보구녀관에서 진료하던 여의사 엠마 언스버거 Dr. Emma Ernsberger 선교사가 볼드윈 진료소를 맡았다.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 Dr. Emma Ernsberger가 동대문에 건축하여 동대문 부인병원이 됨

 

볼드윈 진료소에 환자가 많아지자 닥터 엠마 언스버거는 1906년부터 증축을 계획하여, 1912년에 3층으로 된 현대식 건물을 준공했고, 1902년 발진티푸스로 평양에서 순직한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봉헌했다. 그리고 1913년 후반에 정동의 보구녀관과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이 통합되었다.

 

1903 년 보구녀관 간호원 양성소를 시작한 Margret J. Edmunds( 가운데 ): 1908 년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가 졸업

 

선교 초기부터 여선교사들은 병원과 함께 의학 교육기관을 세우고자 했으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여성 병원은 늘 만원이었고, 제한된 수의 의료선교사로는 감당이 불가능 했다. 하지만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는 여학생을 받아 주지 않았고,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도 여학생을 받아 주지 않았다. 닥터 로제타 홀은 조선총독부의원 원장 일본인 후지타를 찾아가 청강생으로라도 학생들을 받아달라고 설득했다. 덕분에 1914년에 평양에서 훈련시킨 세 여학생을 청강생으로 보낼 수 있었다. 3명 중 김영흥과 김해지가 3년 과정을 수료하여 1918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의사면허를 받은 여의사가 되었다. 그 때 함께 의사면허를 받은 안수경은 한성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선생님 추천으로 청강생이 되었다.

 

처음 한국 의사면허를 받은 김영흥 안수경 김해지&nbsp: 위줄 맨 왼쪽 닥터 로제타 홀 맨 오른쪽 닥터 메리 커틀러

 

그 외에도 닥터 로제타 홀은 황애덕을 동경여자의과대학에 유학을 보내고, 조선총독부의 의생면허 제도를 통해 간호원이던 이그레이스와 노수잔을 교육하여 의생면허를 받게 하는 등, 여성의료인 양성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했다.

 

평양 광혜여원에서 수술하는 닥터 로제타 홀과 마취를 돕는 이그레이스

 

1921, 닥터 로제타 홀은 여성의학교육을 구체화하기 위해 평양을 떠나 한양의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의예과를 둘 것을 건의 했는데, 실현되지 않아, 1928년에 따로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개설했다. 1933년에 닥터 로제타 홀이 은퇴하여 귀국한 후에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동경의학전문학교 출신 김탁원이 소장을 맡아, 현재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1923년 대학과 건물로 완공된 이화학당의 프라이 홀: 제6대 당장 Miss Alice Appenzeller 박사가 세움

 

1910년에 선교사 룰루 프라이 제4대 당장은 이화학당에서 대학과를 시작했는데, 일제의 기독교 탄압과 우민화 정책 등으로 대학인가를 받지 못하다가, 선교사 앨리스 아펜젤러 제6대 당장이 마침내 1925423일에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19247월에 종합대학교를 세우기 위해 신촌에 부지를 마련했고, 본관을 완공한 193539일에 전문학교와 보육학교 교직원과 학생 약 450명이 정동 이화학당을 떠나 신촌 캠퍼스로 이전했다. 수많은 탄압이 있었지만, 7대 교장 김활란 박사는 일제의 요구에 따라 19438월에 재단법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여 학교를 유지했다.

 

1935 년 신촌에 완공된 첫 교사 파이퍼 홀: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1945, 경성여자전문대학으로 명칭이 강제로 변경되고, 4월부터 3년제 후생과, 육아과, 1년제 보육전수과, 교육전수과를 설치했고, 후생과를 통해 의료인 양성을 계획했다. 그 후 815일에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교명을 회복하고, 바로 종합대학 인가를 신청하면서, 한림원, 예림원 및 행림원의 3원을 두고, 한림원에 문과·가사과·교육과·체육과를, 예림원에 음악과·미술과를, 행림원에 의학과·약학과를 설치했다. 그 해 1015일에 입학시험(21의 경쟁률)에 합격한 93명이 행림원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1945 년 신촌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

 

그리고 이화여자전문학교는 다음 해인 1946815일에 문교부 인가 제1호 종합대학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1946년에 의학부에는 50명이 입학했고 194798일에 31의 경쟁률로 63명이, 6.25 전쟁 바로전인 1950610일에는 50명이 입학했다.

 

6.25 전쟁 중 이화여자대학교 부산 가교사

 

19513월에 학제 변경에 따라 행림원을 의약대학으로 개편하여 의학과, 간호학과, 약학과를 두었다. 6.25 전쟁 중에도 부산 피난지에서 수업을 계속하여 1951820일에 부산 피난지 가교에서 첫 졸업생 24명과 대구전시연합대학인 경북의대에서 졸업한 3명을 포함 제1회 졸업생 27명을 배출하였다. 그 후 28, 313, 45, 59명이 졸업하여 2023년까지 의학전문대학원 졸업생까지 4700여명의 여의사를 배출하였다.

 

6.25 전쟁 중 부산 가교사 졸업식

 

미국의 첫 여의사는 1849년에 어렵게 배출되었다. 미국이 여성에게 초등교육을 시작하고 거의 200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메리 스크랜튼은 1828년에 설립된 여성 고등교육기관 Norwich Female Academy, 로제타 홀은 1850년에 세워진 펜실베니아여자의과대학, 박에스더는 1882년에 세워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시 미국 여성들은 대학교육을 받고 전문인이 되길 원했지만, 일반 대학에서 잘 받아 주지 않았다. 의사가 되어도, 사회에서 여의사를 인정해 주지 않아 활동이 어려웠다. 해외 선교도 여성은 선교사의 보조역할을 할 뿐이었다. 18693월에 인도의 여성 선교를 위해 독자적으로 여선교사를 파송하고자 보스톤 Tremont Street Church에서 결성된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는 조선에 여성 교육과 선교를 위해 메리 스크랜튼을 파송했다. 그 후 조선에도 여의사가 절실히 필요함이 알려져 WFMS에서 여의사를 계속 파송했지만, 넘쳐나는 환자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조선 여성 의료인 양성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국에서 여성이 교육받고 전문인이 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경험한 여선교사들은 조선에 여자대학교와 여자의과대학을 세우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맞아 이화학당의 대학과는 오히려 전문학교로 강등되었고, 여자의과대학 설립은 더욱 요원했다. 그런데 1945년에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자, 이화여자전문학교는 그렇게 기다리고 바라던 종합대학교가 되었고, 의과대학을 시작하여, 19518월에 27명의 첫 의과대학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 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