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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더기념사업회를 시작하며

 

 

 

박에스더 1877.3.16~1910.4.13

 

 

이화학당: 1886년 11월에 정동 언덕에 완공된 200칸 크기의 한옥 기숙학교

 

김점동이 이화학당에 보내졌을 때가 만 9, 만약에 이화학당이 없었으면 그녀는 만 14살쯤에 어느 집에 시집보내지고, 그 곳에서 아이 키우고, 길쌈하고, 농사지으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이화학당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한 사람, 바로 자신의 참모습이었다.

 

1890년 로제타 홀 선생님이 찍은 만 13살의 김점동

 

1877316, 김점동은 정동에 살던 가난한 양반 김홍택과 연안 이씨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김홍택은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일을 돕고 있었다. 헨리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튼 가족과 함께 미국 북감리교 해외선교부에서 처음으로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였다. 김홍택은 1886년 봄에 넷째 딸이 태어나자,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셋째 딸 점동을 이화학당에 보냈다.

 

Mrs. Mary Fletcher Scranton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는 18856월에 정동에 도착하여, 여학교를 세울 부지를 마련하고, 18862월부터 200여칸 크기의 한옥 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에, 당시로서는 대궐 같은 한옥 교사를 완공하였다. 1886531,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 온 김씨 부인이 첫 학생이었고, 그해 11월에 김점동이 이화학당의 다섯 번째 학생이 되었다. 김씨 부인은 세달 만에 공부를 포기했고, 김점동이 학생이 되었을 때 다른 세 명의 소녀들이 있었다.

 

1890년경 이화학당의 학생들과 선교사님들

 

18901014,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가 보구녀관에 도착했다. ‘보구녀관은 남성에게 몸을 보이기를 꺼려하던 조선의 여성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마련한 여성 전용 병원이었다.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의 아들- 닥터 윌리엄 스크랜튼 선교사는 18856월부터 정동에 마련한 자택에서 환자 진료를 시작했다.

 

Dr. William Benton Scranton Rev.

 

이듬해 18866, 윌리엄 스크랜튼은 한옥 한 채에 수술실을 갖춘 진료소를 마련했는데, 이곳에 고종은 시병원사액현판을 내렸다.

 

1886 년 6 월15 일 American Doctor's Dispensary 로 개원한 '시병원' (Universal Hospital)

 

188710,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서 파송된 여의사 메타 하워드는 시병원에서 여성 환자 진료를 맡았다.

 

Dr. Meta Howard 1862. 6.13~1930. 7.28

 

다음 해 1888년에 따로 한옥에 진료소를 만들었는데, 고종이 보구녀관사액현판을 하사했다. 사액은 왕이 선정한 교육기관에 현판과 기수를 보내는 제도였다메타 하워드는 2년간 환자 진료를 하다가, 과중한 활동으로 건강이 나빠져 미국에 돌아갔다.

 

1888년 10월 보구녀관' (普救女館)

 

그 후 1년간, ‘시병원의 닥터 윌리엄 스크랜튼과 닥터 윌리엄 맥길이 보구녀관환자도 진료했다. 조선에 도착한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는 다른 준비를 할 겨를 없이, 다음 날부터 여의사를 기다리던 환자들을 진료했다.

초기 이화학당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 때 이화학당 교사 로드 와일러 선교사가 통역을 했는데, 심한 감기에 걸려, 영어를 잘하던 이화학당의 학생 김점동과 오와가가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을 돕게 되었다.

 

1890 년 Dr. Rosetta Sherwood

 

18901024일부터 김점동은 보구녀관에서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을 하고, 약을 조제하기 위한 계량법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18911월부터는 다른 네 명의 학생들과 생리학 수업도 받고, 수술 보조도 하고, 해부학과 약리학도 배웠다. 처음에 김점동은 의사가 하는 일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1894년 4월 여메례 노수잔 김점동: 초기 의학교육을 받은 학생들

 

그러나 화상으로 기형이 된 손가락을 수술하여 제 모양을 찾고, 구순구개열로 얼굴이 일그러진 여인이 남편에게 천대를 받고 살다가 얼굴 모양을 회복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차츰 의사의 역할이 귀하게 여겨졌다.

 

1890년 보구녀관: 1913 년에 동대문 릴리안 해리스기념 병원과 통합됨

 

1888년 장마철에 회개하고 믿음이 확고해진 김점동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의사가 되고 싶은 소망을 가졌다. 닥터 로제타 셔우드도 김점동이 의사가 되어 조선의 여성들을 돕게 되길 바랐다.

그런데 189412, 로제타 홀은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8941124, 남편 닥터 윌리엄 홀이 청일 전쟁 후 격전지였던 평양에서 환자를 돌보다 전염병에 감염되었는데, 끝내 회복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에 빠졌을 때, 주변의 권유로 돌이 갓 지난 아들 셔우드 홀을 데리고 만삭의 몸으로 귀국을 결정하였다.

 

Dr. William James Hall

 

닥터 윌리엄 홀은 중국 선교사로 떠나기 전, 뉴욕의 빈민가 진료소를 맡고 있었을 때, 로제타 셔우드가 의료선교사 준비를 위해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그 한 달 후 윌리엄 홀은 로제타 셔우드에게 청혼을 했는데, 로제타 셔우드는 결혼보다 조선 선교사의 길을 택해 조선으로 떠나 왔다. 그 후 윌리엄 홀은 선교지를 변경해 조선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고, 다음해인 1892년에 로제타 셔우드와 결혼했다.

 

Dr. William Hall: 1894 년 청일전쟁 후 평양

 

그 후부터 로제타 셔우드는 로제타 홀로 불렸다. 윌리엄 홀은 평양 선교 개척을 맡아 결혼 후에 부부가 함께 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 2년 만에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 두고 천국으로 떠나갔다. 짧은 선교 기간이었지만 윌리엄 홀은 많은 것을 남겼다. 박여선도 윌리엄 홀의 헌신적인 삶에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되었고, 윌리엄 홀의 소개로 김점동과 결혼하였다.

 

1893.5.24 박여선과 결혼

 

김점동은 1893524일에 결혼 후, 18945월에 홀 부부와 함께 평양 선교에 합류했다. 그런데 두 달이 안 되어 청일전쟁이 발발해 모두 한양으로 복귀했다. 그즈음 김점동은 첫 아들을 조산 후 36시간 만에 아기를 잃었다. 로제타 홀이 귀국을 결정하자, 김점동은 미국에 따라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로제타 홀도 김점동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로 여겨, 김점동 부부를 미국에 데려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1895 년 9 월 박에스더 부부와 닥터 로제타 홀 가족이 미국에서

 

미국에 도착한 박여선은 김점동이 먼저 공부하도록 결정하고 본인은 농장에서 일을 했다. 김점동은 18911월에 세례를 받고, 세례명으로 에스더를 선택해서, 고국에서 에스더로 불리다가, 미국에서는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서 공립학교에 들어갔다. 박에스더는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라틴어 등 과외 수업도 받았다. 2년이 안된 1896101일에 마침내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882년에 세워진 4년제 의과대학이었다.

 

볼티모어  로레인 파크 박여선의 묘지: 1900년 4월 28일 소천

 

그런데 18973월에는 돌이 막 지난 딸이 폐렴으로 천국에 가게 되고, 1899년부터는 박여선이 폐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박에스더는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남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일도 하고, 남편 간호도 하며, 힘겹게 학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박여선은 박에스더의 졸업을 얼마 앞두고 1900423, 31세에 소천했다.

 

박에스더: 1900년 5월14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졸업

 

1900514, 박에스더는 영예롭게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미국 의사면허를 받았다. 박에스더는 미국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함께 일하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19008월에 모두가 기다리는 조국을 향해 떠나왔다. 박에스더를 후원해 주던 미국 북감리교 선교회는 박에스더가 조국에서 일할 때 필요한 의료 기구를 마련하여 박에스더를 정식 선교사로 파송했다.

 

평양 광혜여원: Dr. Rosetta Hall 이 평양에 세운 여성병원

 

190010, 조선에 도착한 박에스더는 평양의 광혜여원에 부임하여 로제타 홀을 도왔다. 함께 수술하고 왕진도 하고 틈틈이 위생교육과 교과서 번역 등, 조선의 여성들을 깨우치는 일에 앞장섰다. 로제타 홀의 맹아학교도 돕고, 무엇보다 성경공부와 선교에 힘을 기울였다. 19015월에는 보구녀관의 닥터 메리 커틀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어, 박에스더가 6월부터 보구녀관의 책임의사로 부임했다. 1890년에 보구녀관에서 의학을 접하고 11년 만이었다. 의젓하게 수술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박에스더를 보며, 그동안 응원하며 기다리고 있던 스크랜튼 가족, 로제타 홀, 그리고 많은 친구들에게 자랑이고 보람이었다.

 

 

19033, 메리 커틀러가 보구녀관에 복귀하여, 박에스더는 다시 평양에 부임했고, 평양 뿐 아니라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치유하고 교육하고 선교하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1905년부터 박에스더에게 결핵 증상이 나타났다. 치료를 위해 중국 해안가로 요양을 떠나기도 했지만, 안타까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남겨둔 채, 1910년 만 33세에 천국으로 떠나갔다. 박에스더의 삶은 짧았지만, 조선을 일깨운 선각자의 삶을 살며, 희망이 없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꿈과소망을 심어 주었다.

 

미국 유학 당시의 박에스더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치유와 교육과 선교의 사명을 위해 온 생을 바친 박에스더의 삶을 기리고, 박에스더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견디며 꿈을 이루게 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정신을 널리 전파하여, 서로 돕는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아 2021년부터 이화박에스더기념사업회를 시작하였다.

 

2018년 4월 미국 한인 감리교인들은 볼티모어의 박여선의 묘에, 묘지를 알 수 없는 박에스더와의 사진을 넣어 부부의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