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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이던 메리 스크랜튼과 로제타 홀

 

 

로제타 셔우드는 남북전쟁이 끝나던 해인 1865년에 태어났다. 로제타의 어머니(Phoebe Sherwood)는 로제타의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좋아했고, 전문 여성으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 좋았다. 탈출 노예였던 조(Joe)도 로제타의 지원자 중 하나였다. 로제타의 아버지(Rosevelt Sherwood)는 노예농장에서 탈출 후 캐나다로 피해 가던 25살의 Joe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함께 살았다. 훌륭히 학업을 이어가며,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로제타를 보고 있는 것이 Phoebe Joe의 행복이었다. 

 

 

 

 

1620년 유럽에서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 간 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해는 150여년이 지난 1776년이었다. 당시 신앙의 자유를 지켜 줄 수 있는 국가 건설을 위해 목숨을 건 전쟁도 했고, 모두에게 똑같이 부여된 천부의 인권이 근간이 된 헌법으로 나라를 세웠지만, 그 나라에 여전히 노예가 있었고, 여성은 소외되었다. 자신의 이름도 못 쓰는 여성도 많았고, 교육 받은 여성도 결혼하면 집안에서 육아와 가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1861, 남북 전쟁이 시작되자 남성이 하던 일들을 여성이 맡게 된다. 특별히 여성의 교회 활동이 활발해졌고, 남성의 역할이었던 성경을 가르치는 일 등을 맡아하며, 신앙이 깊어지고 사명감도 커졌다. 4년 만에 전쟁이 끝나고 남성들이 복귀하자, 여성들은 오히려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그들의 열정은 해외 선교로 향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4년 뒤, 1869 3월 남보스톤 Tremont Street Church는 인도의 소녀들과 여성을 위한 여성 의료선교사 파송을 결정하고, 이를 후원하기 위해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 (WFMS; The 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North)를 결성한다. 

 

 



1872 40세 되던 해에 남편을 여읜 스크랜튼 여사는 WFMS 일에 적극 참여하는데, 아들 William Scranton 이 내과의사가 되어 개원을 하게 되어 아들과 함께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로 이사를 간다. 그 후 1883 9, 오하이오주의 라벤나에서 WFMS 지방선교회가 열렸는데, 인도와 일본 선교 보고와 토의를 진행하는 중에, 볼드윈 부인은 미지의 땅 조선이 열리게 되면, 그곳의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써 달라고 따로 헌금을 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조선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2년 뒤인 1885년에 스크랜튼 여사 가족은 조선 선교사로 파송된다.

 

 





한편 로제타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를 하고 있던 1885년 봄 주일날, 교회에서 인도 선교사 부부의 선교 보고를 듣게 된다. 인도는 여성이 남성을 피하기 때문에 여성을 전도하고 치료하기 위해서 여의사가 꼭 필요함을 피력하는 캐너드 챈들러 부인의 목소리는 어려서 가졌던 선교사에 대한 꿈을 일깨웠고, 로제타는 1886년에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889년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실습과정에서 만난 윌리엄 홀은 로제타와 결혼하여 중국 선교사로 떠나기를 희망했는데, 로제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거절한 후, 예정대로 1890년에 조선을 향해 떠나 왔다. 그 때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간 스크랜튼 여사는 윌리엄 홀이 조선으로 선교지를 바꾸도록 도와서, 윌리엄 홀은 1991년 말에 조선에 와 사랑하는 로제타와 다시 만난다

 

 
 



결혼을 결심한 로제타가 어머니 Phoebe께 허락을 받으려 할 때, 로제타의 독립적인 삶을 지지했던 Phoebe Joe는 크게 반대를 한다. 그러나 로제타는 결혼 후에도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 그 후 많은 난관들이 있었지만, 로제타는 조선에서 43년을 여성을 위한 진료와 교육에 전념했다. 

 

 

 

 

 

로제타의 어머니보다 3년 아래였던 스크랜튼 여사와 아들 윌리엄보다 9살이 어린 로제타가 일편단심 소외받은 여성을 돕는 일과, 여성이 여성을 도울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에 한마음 이었던 것은, 당시 자기 성취가 어렵던 미국 여성들에 대한 연민과 신앙과 교육을 통해 여성도 소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서이다. 그들의 확신은 후대의 선교사들에게 이어졌고, 고등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자대학교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서, 1945년에 해방이 되자 이화는 한국 최초의 대학교로 문교부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