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에스더의 삶
1.이화학당 입학
1886년 11월, 이화학당의 다섯 번째 학생으로 스크랜튼 여사를 만났을 때, 김점동(1877.3.16~1910.4.13)은 만 9세였다. 큰 언니는 집을 떠나 시집을 갔고, 둘째 언니는 시집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동생은 갓 태어났을 때였다. 너무도 낯선 파란 눈의 선생님이 난로 가까이 앉으라고 할 때, 어린 점동은 처음 보는 그 난로 속에 집어넣어질 것 같아 무서웠다.

그 서양 선생님은 정한 뜻을 위해, 사랑으로 헌신하며, 신실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조선 여성들은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삶에 녹아 있는 언어와 생각을 배우며, 점동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개인의 권리가 무엇인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와, 삶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참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아 가며 학교와 선생님을 깊이 사랑했다.

2년 뒤, 1888년 장마철 밤, 거센 빗소리가 들릴 때, 점동은 노아의 방주에 내리던 비 생각이 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싸인다. 그 때 함께 있던 친구 오와가와 그동안 미워했던 친구들 이야기를 하는 중,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간절히 기도하자, 두려움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한다. 스크랜튼 여사와 로드와일러, 이경숙, 벵겔, 페인, 그 밖의 여러 선교사들과 선교사 부인들로부터 다양한 수업을 받고, 함께 생활하며, 신앙도 깊어지고, 성품도 좋아지고, 점차 여성스러워졌다.

2. 미래에 대한 꿈
그 후 2년 뒤, 이화학당에서 생활한지 4년이 된, 1890년 10월에는 닥터 로제타 셔우드가, 건강 악화로 귀국한 닥터 메타 하워드의 뒤를 이어, 1887년 10월에 여성 환자를 위해 시작된 보구녀관에 부임해 왔다. 로제타는 언어 교육을 받을 틈 없이,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을 돌보아야 했고, 점동은 2-3명의 다른 학생들과 통역을 하며 진료를 돕게 된다.

한 달쯤 됐을 때, 4년 전에 화상을 입어 오른손가락 셋이 손바닥에 붙은 16살 소녀가 시골에서부터 치료를 받으러 왔다. 손가락 분리 수술 후, 피부 이식을 하려하자, 환자는 피부를 떼어내는 것을 거부했다. 로제타 선생님은 자신의 피부를 떼어 일부를 이식해 주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자원했고, 환자와 환자 오빠도 참여하여 환자는 손가락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점동은 혹시 가족이거나 로제타 선생님이면 해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피부를 떼어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점동은 외과 수술 과정도 혐오스럽고 불편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수술을 돕는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보며, 로제타 선생님은 점동이 의사가 될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1891년 1월에 점동은 세례를 받고 세례명으로 에스더를 선택해서, 그 후부터 에스더로 불려졌다. 한편 다른 4명의 학생들과 생리학 약리학 등의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3월과 4월에는 4건의 언청이 수술이 있었다. 에스더는 갈수록 능숙하게 수술을 보조했고, 수술 받은 후 여인들의 변화된 모습과 삶을 대하며, 의료의 필요를 절감하고, 혼자 힘으로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은 꿈을 갖게 된다.

3. 결혼
16세 전에 결혼을 시키던 당시에, 가족들은 에스더의 혼인이 늦어지는 것을 염려했으나, 에스더는 학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다급한 에스더 어머니의 재촉으로 스크랜튼 여사와 로제타 홀은 신랑감을 서둘러 찾았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그 때 윌리엄 홀은 그를 돕고 있던 박여선을 소개한다. 박여선은 윌리엄 홀이 평양에 다녀올 때 마부로 기용했는데, 윌리엄 홀의 진실한 삶을 대하며 기독교인이 되어, 윌리엄 홀의 신앙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로제타 홀에게 박여선은 온화하고 겸손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키도 크고 잘 생긴 청년이었고, 앞으로 에스더와 함께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해낼만한 사람으로 믿어졌다. 에스더도 신앙의 길을 같이 갈 수 있다면 지위나 신분에 상관없이 결혼하겠다고 하여,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에스더가 만 16세 때인 1893년 5월에 결혼한다. 당시 만25세였던 박여선은 에스더의 도움으로 점차 신앙이 확실해 졌고, 더욱 신실해졌다.

그 후 새로운 개척지인 평양에 부임하게 된 로제타 홀은 에스더에게 기독교 박해가 유난히 심했던 평양 선교에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에스더는 우리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목숨까지 내 놓겠다는 각오를 했고, 1894년 5월에 다 같이 개척지 평양으로 떠나간다.
4. 미국 유학
1891년 12월에 미국에서 로제타 셔우드에게 청혼을 했던, 닥터 윌리엄 홀이 조선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892년 6월에 두 사람은 결혼하여 로제타 셔우드는 남편 성을 따라 로제타 홀이 된다. 그런데, 결혼 후 2년 째인 1894년에 부부는 평양으로 개척 선교를 위해 파송되어 5월에 평양으로 떠나 갔다. 그런데 그해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 모두 한양으로 복귀했는데, 윌리엄 홀은 치열했던 9월 평양전투로 인해 부상당한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홀로 평양에 올라 갔다. 윌리엄 홀은 열악한 환경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지치고 쇠약해진 상태에서 말라리에에 걸려 한양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런데 돌아 오는 배가 파선하여 지연이 되고, 배에서 발진티푸스 까지 걸린 상태로 어렵게 한양으로 돌아 왔다. 병세가 너무 심해, 한양에 있던 모든 동료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1894년 11월 24일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큰 충격에 빠진 로제타 홀은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미국에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이 때 에스더는 미국에 가서 의학공부를 하고 싶은 의사를 밝혔고, 로제타 홀도 에스더에게 기회가 온 것으로 여겨, 미선교부의 미국 동행의 허락을 받고, 지인들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는다.

1894년 12월에 둘째를 임신하여 9개월이던 로제타 홀을 만1세 된 아들 셔우드 홀과 에스더부부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 도착 후, 에스더는 1년 반 동안 공립학교에 다니는 등, 각고의 노력으로, 1896년 10월,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 최연소학생으로 입학한다. 다음해인 1897년 5월에 로제타 홀은 미국에 도착하여 출산한 딸과 아들 셔우드를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되는데, 이 때, 고생하는 에스더에게 공부를 포기하고 함께 귀국할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에스더부부는 남아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한다.

5. 의과대학 졸업
부인이 먼저 공부하도록 결정한 박여선은 에스더를 뒷바라지하기위해 뉴욕 주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열심히 노력하여 영어도 유창해졌고, 로제타 홀이 떠난 뒤에는 볼티모어에 가서 에스더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에스더가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바라며 응원하던 박여선은 그만 결핵에 걸려, 에스더의 졸업시험을 3주 앞 둔 1900년 4월에 세상을 떠난다. 미국에서 낳은 둘째 딸을 잃고 남편을 잃는 슬픔을 딛고, 낮에는 공부 외에 생활비와 남편의 병원비를 벌고, 밤에는 남편의 병간호를 하는 등, 겹치는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 에스더는 좋은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하여 무사히 의과대학을 졸업한다. (평양 개척선교에 합류하여 평양으로 갔다가 청일 전쟁으로 한양에 복귀하고 얼마 안되어 에스더는 첫째 아들을 조산하고 36시간 만에 잃었다.)

미국에서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학교에 입학하고, 의사가 된 후에 닥터 박으로 불린 박에스더는 미국에 유학한 조선 첫 여학생이었고, 1893년에 서재필이 처음 미국의사가 된 후, 1900년에 두 번째 미국의 면허를 받은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 닥터 박은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도록 제안을 받지만, 조국의 여성을 도우려던 초심대로 스크랜튼 여사와 로제타 홀을 파견한 미국 북감리교 해외여선교회의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아, 모두가 기다리는 조선으로 돌아온다.

4. 진료와 선교
조선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했던 스크랜튼 여사와 로제타 홀에게 박에스더는 참으로 보배로운 결실이었으며, 큰 자랑이고 보람이었다. 박에스더는 귀국하여, 1900년 10월부터 로제타 홀이 일하고 있던, 평양의 광혜여원에 보조의사로 부임했다.

박에스더가 독립적으로 병원 일을 잘 감당해 가자, 로제타 홀은 맹인학교, 외국인학교, 전도부인 양성, 지방선교 순회 활동 등 그 동안 못 다한 일들에 집중했다. 1901년 7월에는 건강이 나빠진 로제타 홀과 보구녀관의 메리 커틀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어, 광혜여원은 동대문 병원의 릴리안 해리스가 맡고, 박에스더는 보구녀관을 맡게 된다.

결혼하여 떠난 지 8년 만에 만24세의 박에스더는 책임 의사로서 이화학당 보구녀관에 부임하였다. 그 후 박에스더의 쉼 없는 노력으로 보구녀관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질병뿐 아니라 환자들의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루만지며, 적극적인 선교와 교육 활동을 하여, 여러 여성들이 교회에 다니게 되고, 전문직 여성으로 훈련받게 된다. 당시 동대문진료소의 엠마 언스버거, 세브란스병원의 올리버 애비슨과 협조하며 진료하였고, 간호 선교사 마거릿 에드먼즈의 간호원양성소 설립과정에도 기여하였다.

1903년 3월, 메리 커틀러와 로제타 홀이 복귀하여, 박에스더와 로제타 홀은 다시 평양으로 가서, 광혜여원 진료와 황해도구역, 신계구역, 평양시의 복음 전파 임무도 맡아 활발히 활동한다.

5. 아쉬운 시간
질병과 선천성 기형 등의 고통 속에 살던 사람들을 치료하고,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며, 야만적 치료 행위와, 잘못된 건강의식과 위생관념을 계몽하기 위해 교재를 만들고, 교과서를 번역하고, 강의를 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며, 올바른 자아의식과 가치관을 가르치고, 적극적인 전도와 성경공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희망을 심어 주던 박에스더는 1905년 7월, 몸이 쇠약해지며 폐결핵으로 인한 늑막염과 심장병을 앓게 된다.

로제타 홀도 병이 나서 2개월간 병원 문을 닫고 휴양하지만 병세에 차도가 없자, 박에스더는 9월에 중국의 남경으로 요양을 간다. 남경에서 돌아와 1906년에는 제한적 활동을 했고, 1907년에는 수술과 응급 진료도 하고, 1908년에는 정규 업무도 맡게 되었는데, 다시 병세가 악화되었다. 진료를 못하는 상황이 되자, 박에스더는 번역 활동을 하거나 주일학교와 성경학교의 일을 도왔다.

당시 박에스더의 헌신적인 의료와 여성계몽 활동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1909년 4월에는 관민 합동으로 열린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영회’에 여성도 교육을 받아 능력 있는 전문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박에스더는 하란사, 윤정원과 함께 초대되어 메달을 받고 답사를 한다.

그러나 건강이 더욱 나빠진 박에스더는 1909년 가을 성경학교를 마지막으로 평양을 떠나 작은언니 신마리아의 집으로 가게 된다. 희망을 놓지 않고 투병했지만, 박에스더는 1910년 4월, 남편이 돌아 간 그 달에, 그녀를 소중히 여기며 안타까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남겨 둔 채, 33년의 짧은 생을 마친다.

5. 조선의 등불
이역만리 낯선 땅에 와서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교육을 통해 자아실현을 돕고, 지키고 사랑해야할 조국이 있음을 일깨워 준 선교사님들을 따라, 깨닫고 배운 것을 목숨 다해 실천한 박에스더는 세계적 수준의 지성과 인품을 지닌 전문여성의 생생한 모델로서, 그녀에게 도움을 받고 그녀를 만나본 사람들에게, 특별히 개인이나 자유의 개념조차 없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충격적 도전이고, 새로운 희망이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선택과 부단한 노력으로 참다운 자기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의 본을 보인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는, 지금도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히 비추며, 우리의 등을 밀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