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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독교 선교를 압당긴 이수정 선교사

 

1882.6.9. 일어난 임오군란 때, 구식군대가 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을 때, 민비를 충주로 피신시켜 목숨을 구한 공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은 이수정(1842~1886)은 일본에 갈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친구 안종수(1881 일본 방문)가 소개해 준 일본인 농학자 츠다센( Tsuda Sen 1837~1908)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고, 다음해인 1883 429, 도쿄 소재의 교회에서 일본인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그는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며, 선교사들에게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일본에 와 있던 조선 유학생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맨 앞 줄 가운데 츠다센과 이수정

1883.12.13.에는 미국의 선교잡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간절한 내용의 글을 기고한다. 한편 그 해 9, 민영익이 이끄는 견미사절단(보빙사)이 미국에 도착하여, 

 

보빙사 견미사절단 1883년

 

 3개월 머물 동안, 기차에서 그들을 만난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 목사는 조선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해 말, 뉴욕의 감리교 선교부에 2000달러의 헌금과 함께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극동선교 담당으로 파송되어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1907) 선교사에게 조선 상황을 알아보도록 부탁을 한다. 

 

Rev. John Franklin Goucher, 1845-1922

 

이수정과 개화파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조선에 관심을 갖고 있던 멕클레이 선교사는 1884. 6월에 부인과 조선에 가서 후트 공사와 김옥균의 도움을 받아, 7월초에 고종으로부터 조선에서의 교육과 의료사업을 허락 받게 되고, 그가 머물던 공사 근처 정동에 있던 집을 구입해 달라고 부탁하고 일본에 돌아 와 미국 감리교해외선교부에 보고한다. 그 후 해리스 선교사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스크랜튼 여사의 집을 직접 방문 해, 조선 선교사를 제안하였고, 그 해 에 스크랜튼 여사(1884.10)와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1884.12)은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는다.

 

Rev. Robert Samuel Maclay 1824~1907

 

이수정의 편지는 1884년 초, 미국의 여러 기독교 소식지에 실렸고, 그 글은 북장로교 선교회가 선교를 준비하는 동력이 되어, 의사 존 헤런이 6월에 선교사로 임명이 되고, 언더우드는 조선으로 선교지를 변경하게 된다.

 

1887년 윗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트랜튼 헤론 가족

그리고,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와 맥클레이 & 녹스 (G.W. Knox)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성서번역을 하게 되는데, 한문 성서에 토를 달아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고, 1885 2월에는 한문 성서에 한글을 병기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新約馬可傳福音書諺解) 6000부를 요코하마에서 출판한다.

 

뒷줄 중앙이 이수정, 뒷줄 왼쪽 끝이 조지 낙스 선교사 앞줄 중앙이 헨리 루미스 선교사

 

1885 2월에 미국을 출발 한 스크랜튼 여사 가족과 아펜젤러 선교사는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불안하여진 조선으로의 입국이 지연되자, 일본에 머물면서 이수정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조선 문화를 공부하고, 그가 번역한 성서와 교리문답서를 들고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그 후 이수정은 귀국을 종용받아 조선에 돌아 왔다가, 1886년 수구파에 의해 처형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토한한신약성서> 와 < 신약마가복음셔연해 > 일부

 

가우처목사는 그 후에도 많은 헌금을 하여, 정동에 보구녀관과 이화학당, 배재학당 건립에 기여하였고, 훗날 연희대학 건립도 도와 초기 조선 의료와 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