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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이던 메리 스크랜튼과 로제타 홀 로제타 셔우드는 남북전쟁이 끝나던 해인 1865년에 태어났다. 로제타의 어머니(Phoebe Sherwood)는 로제타의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좋아했고, 전문 여성으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 좋았다. 탈출 노예였던 조(Joe)도 로제타의 지원자 중 하나였다. 로제타의 아버지(Rosevelt Sherwood)는 노예농장에서 탈출 후 캐나다로 피해 가던 25살의 Joe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함께 살았다. 훌륭히 학업을 이어가며,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로제타를 보고 있는 것이 Phoebe와 Joe의 행복이었다. 1620년 유럽에서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 간 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해는 150여년이 지난 1776년이었다. 당시 신앙의 자유를 지켜 줄 수 있는 국가 건설을 위해 목숨을 건 전쟁도 했고..
어려웠던 미국의 초기 여성 고등교육 어려웠던 미국의 초기 여성 고등교육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지의 땅 아메리카를 향해 떠나온 게 1620년, 그 후 하버드대학은 1636년에, 예일대학은 1701년에 설립되었고, 최초 의과대학은 1765년에 펜실베니아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여성들은 학업의 기회가 거의 없었고, 많은 여성이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게다가 의과대학은 여학생을 받아 주지 않았다. 1847년 뉴욕 주 제네바 의과대학에 여학생(Elizabeth Blackwell)이 지원을 했을 때, 학생들은 당연히 안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장난삼아 찬성투표를 던진 몇몇 학생들 덕에 여학생이 처음으로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엘리자벳 블랙웰은 수많은 수모를 겪으며 졸업을 하고 ..
박에스더기념사업회를 시작하며 김점동이 이화학당에 보내졌을 때가 만 9살, 만약에 이화학당이 없었으면 그녀는 만 14살쯤에 어느 집에 시집보내지고, 그 곳에서 아이 키우고, 길쌈하고, 농사지으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갔을 것이다. 이화학당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한 사람, 바로 자신의 참모습이었다. 1877년 3월 16일, 김점동은 정동에 살던 가난한 양반 김홍택과 연안 이씨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김홍택은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일을 돕고 있었다. 헨리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튼 가족과 함께 미국 북감리교 해외선교부에서 처음으로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였다. 김홍택은 1886년 봄에 넷째 딸이 태어나자,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셋째 딸 점동을 이화학당에 보냈다.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는 1885년 6월에 정동에 도..
간추린 이화의대 역사 History of Medical School of Ewha Womans University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의 기원 닥터 윌리엄 스크랜튼 Dr. William Benton Scranton 선교사는 1884년 10월에 미국 북감리교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85년 2월에 미국을 떠나 조선에 와서, 6월부터 한양의 정동에 마련한 집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했다. 미국에서 약품이 도착한 1885년 9월 10일 부터는 한옥 자택 한쪽에 정식 진료소를 열었다. 다음 해에는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자리에 있던 넓은 한옥에 수술실과 입원실을 준비해, 1886년 6월 15일, 새 병원을 개원했다. 'American Doctor's Dispensary' (미국 의사의 진료소)로 불리던 이 병원에, 188..